[로마서 12:1 ㅣ 김남수 목사]
여러분이 잘 아시는 미국의 제 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에 관한 일화입니다. 링컨 대통령은 남북전쟁이 예상 밖으로 길어져 희생자가 많아지자 마음이 몹시 아프고 괴로웠습니다.동족끼리 싸우느라 하루에도 수백명씩 젊은 청년이 죽어갔습니다. 마음이 너무 괴로워 그는 집무실에서 하나님 앞에 두세시간씩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꿇어 엎드려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대통령이 열심히 기도하는 모습을 본 장관들도 문 밖에서 송구한 마음으로 그에게 아룁니다.“각하! 우리도 문밖에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그러자 링컨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달라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나는 지금 내가 하나님 편에 섰는가가 걱정일세.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지, 내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있는지 그것이 걱정일세.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중일세”참으로 귀한 예배자의 마음입니다.
로마서 1장부터 11장까지는 무엇을 어떻게 믿느냐에 관한 구원의 교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2장부터 16장까지는 구원받은 믿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하는 것을 말씀하고있습니다. 전반부는 교리부분이고, 후반부는 기독교 윤리를 다룹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윤리와 행실은 교리와 분리되어서는 안됩니다. 행실을 필연적으로 교리에 비추어 항상 존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리는 기독교인의 행실의 분질을 결정하는 근본입니다.
로마서12장 1~2절은 기독교 윤리에 대한 총론입니다. 즉 전체의 요약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한마디로 말하면, 예배를 생활의 중심에 두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가 생활의 중심이고 최우선이 되어야 하고, 목적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분들은 구정같은 귀중한 명절에도 본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고향에 내려갑니다. 여행을 하다가도 주일날은 꼭 돌아와 예배를 드립니다. 부득불 돌아올 수 없으면 어디에서든지예배를 드립니다. 이렇게 예배를 중심으로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예배를 드리되 예배가 생활의 첫 번째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만사를 제쳐놓고 예배가 최우선의 자리를 차지하는 이 원친은 꼭 지켜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드리도록 하기위해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루어지면 그에따라 모든 문제가 절로 풀리는 것입니다. 예배가 최우선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금년도 저희 교회의 네 가지 목표중의 첫째가 예배를 최우선으로 하고 예배 드리는 삶을 삽시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라고 합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 교인들을 ‘형제들’이라 부릅니다. 사도인 자신과 같은 수준에 놓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의 겸손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즉, 명령하지않고, 그들에게 간청하고 권합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신 마음을 가지고 그들이 아름다운 삶을 살도록 권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완벽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산 제사로 드리라’ ‘너희 몸을 산 제사로 드려라’ 여기서 몸은 살로 구성된 신체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경우 몸은 영, 혼, 몸 즉 전인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영도 드리고 마음도 드리고 몸도 드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몸을 산제물로 바치라’는 의미는 구체적으로 진실된 생활 전체를 드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너희 몸을 즉, 너희 생활 전부를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드리라’는 단어의 의미를 생각해 봅시다. ‘드리라’의 단어는 하나님께 제사 드릴 때 사용되는 전문 용어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몸을 하나님께 산제사로 드리라고 하는 것입니다.그러면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몸을 드려야 하는 이유는 몸이 영혼의 표현도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몸을 하나님께 드려 영혼이 하나님의 뜻대로 자신을 나타내도록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몸을 불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적 몸을 하나님께 제사로 드려야 합니다.다음은 ‘거룩한 산제사로 드려라’입니다. ‘거룩’이란 말은 ‘구별한다’는 뜻을 가집니다.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이어야 합니다. 거룩한 삶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각과 말과 행실이 거룩한 제사로 드릴 때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나타내는 향기가 되어 하나님께서 향기로운 냄새를 흠향하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기뻐 받으시는 것입니다.
‘너희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이 말씀을 보면 예배는 곧 제사입니다. 구약의 입장에서 보면 예배가 제사입니다. 제사는 하나님 앞에 재물을 가지고 나아와 바치는 행위입니다. 제사야말로 하나님과 인간이 만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인간은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죄인인 인간에게 하나님께서는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제사에는 몇 가지 기본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로 제물이 온전해야 합니다.
흠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부분을 드려서도 안 됩니다. 전체를 드려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생애, 일부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생 전부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릴 때는 최상의 것을 드려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양보다 질을 중요시 여기십니다.
부유한 사람은 소를 드리고 좀 못한 사람은 양을 드리고 그보다 가난한 사람은 비둘기를 드렸습니다. 자기의 수준에 맞게 드리는 것입니다. 문제는 정성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 의복부터 마음까지 정결해야 합니다. 정성을드려 하나님 만날 준비를 하고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는 자세가 분명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헌금 할 때 미리 새 돈을 준비하여 정성껏 드리는 헌금과 헌금시간에 앞 뒤 주머니를 뒤져 구깃구깃한 것을 꺼내 던지는 것과는 다릅니다. 마음 중심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정성을 드려야 합니다.
셋째 제사의 중요한 의미는 산 제물을 죽여서 드리는데 있습니다.
이미 죽은 것은 재물이 될 수 없습니다. 제물의 생명은 내가 죽이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이 죽입니다. 죄인의 죄를 대신해서 바쳐진 제물이기에 이것은 하나님께서 죄를 심판하시는 의미입니다. 생명을 드리는 것 이것이 제사의 중요한 기본 의미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생명을 대신 주셨습니다. 재물을 죽여 불에 태워서 드렸습니다. 나 자신, 생명을 흔적 없이 다 태워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사의 근본적인 의미입니다.
구약시대 아브라함은 최상의 제사를 드린 본이 되는 예입니다. 하나님께서 100세에 얻은 가장 소중히 여기는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 가서 번제로 드리라고 합니다. 번제는 죽여 가죽을 벗기고 토막을 내 불에 살라 드리는 제사입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시자 아브라함은 충성을 다하여 순종함으로 이삭을 제물로 바칩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생명보다도 더 소중히 여기는 독자 이삭을 진실한 마음으로 순종하여 바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중심을 아시고 그 정성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준비하신 양으로 아들을 대신하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바친 제물이야 말로 진정한 제사였습니다.
신약에서는 제사가 예배입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예배란 헬라어로 ‘라트레이안’ 영어로 service인데 우리말로는 섬김, 봉사의 의미가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영적 예배’를 헬라어로는 ‘로기엔 라트레이안’이라 하였는데 우리말로는 ‘이치에 합당한 예배’한 의미와 같습니다. 이러므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것이 이치에 합당한 예배’라고 한 것입니다. ‘이치에 합당한 예배’는외향적이고 형식적인 예배가 아니라 내면적이고 영적이며 신령한 예배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신약 시대 예배는 구원받은 성도가 성령 안에서 그 영혼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는 축제입니다. 이러므로 예배는 찬양이요, 감사요, 기쁨입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하나님을 섬기면 어떻게 섬기겠습니까?
먼저 구원받은 은혜에 감사하고 기뻐하며 찬양하고 춤을 추고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이러한 예배가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영적 예배입니다. 그러나 형식적으로 찬양하고 형식적으로 기도하고 하나님께 해야 될 의무를 다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일주일 내내 경건하고 진실된 생활을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적 예배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을 보면 천국에서 천군 천사와 구원받은 성도들이 찬양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부터 찬양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때 어두움의 권세가 깨트려지고 묶임이 풀려서 해방과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전도하고 귀신을 ?아내다 무고히 잡혀 빌립보 감옥에 갇혔지만 피투성이가되도록 매를 맞고도 밤중쯤 되어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도드리고 하나님께 예배드렸습니다. 그러자 지진이 일어나 옥문이 열리는 기적이 일어나고 그 밤에 간수의 가족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또한 신약에서 본이 되는 예배는 마리아의 희생입니다. 마리아는 자기의 생명과도 같은 결혼지참금인 옥합을 깨트려 향유를 주님의 발에 부을 때에 주님은 그녀의 헌신을 기뻐하셨습니다.
‘내 장례를 준비하셨느니라’라고 칭찬하시면서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의 행한 일을 말하며 그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을 위해 하는 향내 나는 아름다운 희생이 또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가 됩니다. 진정한 참 예배는 몸을, 즉 생활과 삶 전체를 마리아처럼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적인 삶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내 욕심, 내 명예, 내 더러운 것들을 모두 십자가에 못 박고 나는 이제 죽은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의 마음이 새롭게 변화되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을 분별하여 자기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전폭적으로 순종하여 사는 것이 참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참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죽어지는 시간이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생명을 다시 찾는 시간인 것입니다. 예배는 갈2장 20절 말씀대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받혀 죽은 것이요 내 앞에 사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가 대신 사는 것이 예배의 삶인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나는 이제 죽었다’라고 생각해야 합니다.옛날의 내가 아닌 것입니다. 옛날의 목적도 욕망도 이제 죽고 없습니다. 이것이 몸으로 드리는산 제사입니다. 유명한 일화 하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영국에서 각종 질병으로 시달리는 아프리카를 위하여 의료선교기금을 모금할 때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모금을 하려고 헌금대를 돌렸습니다. 헌금대가 우리는 주머니로 되어 있지만 서양은 세숫대야처럼 둥글넓적한 큰 접시입니다. 큰 접시가 돌아갈 때마다 사람들을 얼마씩 헌금을 올려 놓습니다. 그런데 한 꼬마가 자신의 앞에 온 접시에 얼른 올라앉습니다. 어이가 없어서 ‘왜 거기에 올라 앉았니?’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꼬마는 기막힌 대답을 합니다. ‘저는 돈이 없습니다. 제 몸을 바쳤습니다.’ 바로 이 아이가 커서 뒤에 위대한 아프리카의 성자 리빙스턴이 되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참으로 일생을 고스란히 바쳤습니다.
여러분! 반드시 이런 사람들만이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무슨일을 하든지 자신의 뜻은 ‘이미 제물로 바쳐졌다’는 것에서 비롯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여러분! 복잡한 문제가 있습니까? 풀리지 않는 수수깨끼 같은 문제가 있습니까? 해결할 수 없는 번민, 고뇌가 있습니까? 온전히 바쳐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몸으로 하나님 앞에 바쳐지는 제물이 되어 예배하여야 합니다. 이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새로워져 가는 것입니다. 변화되어 전혀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