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4:25-32ㅣ김남수 목사]
지난 주일 낮 예배 시간에 새사람의 속성에 관해 말씀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신 의를 힘입어 새사람이 되었으니 새사람을 입으라고 합니다. 그러면 새사람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오늘 본문은 새사람의 윤리에 관해서 6가지로 말씀합니다. 우선 여섯 가지에 있어서 공통된 3개의 특성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는 이들 모두는 우리 인간관계와 연관이 있습니다. 둘째는 각 항목은 소극적(옛 사람) 금지와 아울러 적극적인(새 사람) 권면이 대칭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셋째는 예수님이나 사도들의 가르침에는 교회의 행동규범, 신앙과 행위가 항상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틀어 한마디로 핵심이 되는 말씀은 30절에 나오는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하는 말씀이 됩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이면 성령이 함께 하십니다. 롬 8:9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 안에 계셔서 그 마음을 감동하시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시고, 말씀을 향하여 마음을 열어주시고,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말씀을 체험하게 하시고, 어느 사건에 부딪힐 때 말씀이 생각나게 하십니다. 어려운 일을 당할 때도 위로해 주십니다. 그래,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우리 몸은 이성이 지배하고, 우리 이성은 성령이 지배합니다. 성령이 주도하는 그런 인격을 가리켜서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자녀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과 우리와의 관계는 인격적 관계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역사할 때 중생하게 되고, 그 다음에 거룩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런 역사가 있을 때, 성령이 하나님의 자녀 됨을 증거 합니다. 어떤 고난과 환난을 당해도 성령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너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이것도 사랑의 증거다. 계속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성령의 역사는 마술적이거나 기계론적이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마술은 보자기를 딱 펴면 비둘기가 나오고, 또 딱 펴면 꽃이 나오는 것처럼 성령은 갑자기 모든 것이 환하게 확 변화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는 인격적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성령은 믿음과 함께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벌써 겨자씨 같은 믿음이 심겨지는 것입니다. 이제 절대로 옛사람과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성숙하게 자라나지 못해서 약합니다. 죄악의 길에 들어서기도 하고, 죄와 타협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성령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안 된다고, 성령이 나와 인격적으로 함께 할 때 내가 성령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거슬러 세상으로 향하면 성령은 근심하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우리의 생활은 내 양심을 기쁘게 해야 되고, 우리의 판단은 내 이성의 성원을 받아야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생활은 그대로 성령을 기쁘게 해야 합니다. 여러분, 좋은 일을 하면 내 양심이 기쁘지요? 합리적으로 살면 내 이성이 즐겁지요? 그리고 내가 성령이 말씀하신대로 행하면, 내 안에 있는 성령이 나를 칭찬합니다. 기뻐합니다. 이 기쁨을 내가 체험하게 됩니다. 이렇게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않고, 성령께 순종하여 성령을 조용히 띠라가는 신앙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하는 말씀이 오늘 본문의 총론적인 말씀입니다. 자, 이제 그러면 실제적으로 어떻게 합니까? 6가지를 하나하나 보십시다.
첫째, 거짓을 말하지 말고 돌이켜 참된 것을 말해야 합니다.
25절에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가 지체가 됨이니라.” 먼저, 말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진실 하라, 참된 것을 말하라, 우리가 지체가 됨이라. 다 형제자매입니다. 그런데 누가 누구에게 거짓을 말하며 누가 누구를 속이겠습니까? 롬 12:9에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사랑은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진실을 떠나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진실 되게 행하라 합니다. 적극적으로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단순히 거짓을 피하는 것만으로는 큰 의미가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 신뢰할만한 사람이라고 알려져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말을 믿을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것은 교체를 강화시키는 반면, 거짓은 이것을 약화시키고 마는 것입니다. 미국의 제 3대 대통령 「토마드 제퍼슨」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의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이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20개의 거짓말을 만들어 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한번 거짓말을 하고 보면, 그것을 지켜나가려고, 또 다른 거짓말을 하게 되고, 또 하게 되곤 합니다. 원치 않지마는 계속 거짓말을 아니 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인격파탄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내 인격이 파탄되고, 남의 인격에 손해를 주게 되는 그것은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일이다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행위가 아니다 말씀합니다.
둘째로 화를 내지 말고, 너희의 분이 의로움을 확실하게 하라
26절에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 27절에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두 번째로 본문이 말하고 있는 것은 분내는 문제, 분노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며” 이 말씀은 조건적 명령이고, 양보적 명령의 말씀입니다. 설사 분낼 일이 있어서 분을 냈다고 하더라도, 그렇더라도 이렇게 하라고 3가지로 충고합니다. 26,27절을 보면 먼저, “죄를 짓지 말라.” 다음은,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 나아가서,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합니다.
어느 통계를 보니, 살인자가 살인할 때, 그 죄의 원인 가운데 60%가 “분노”라고 합니다. 분노가 살인으로 치닫거든요. 그러므로 먼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 합니다. 분노를 다스릴 줄 아는 자기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다스리지 못하면 그런 죄를 짓게 됩니다. 화를 내고 잘했다 하는 사람 있습니까? 꼭 후회하지요. 조금만 참았으면 될 것을…. 몇 시간 지나면 후회를 합니다. 그런고로 마지막에 가서는 나를 구제불능인가보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스스로 자신에 대해 환멸을 느끼게 됩니다. 분노하면 사건이 악화됩니다. 분노해서 해결될 일이란 없습니다. 또 하나, 판단력을 잃어버립니다. 냉정함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판단이 빗나갑니다. 마지막으로 마귀의 노예가 된다는 것입니다.
다음은,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와는 달리 이스라엘 사람들은 해가 지면 다음 날이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해가 지도록”이라 한 것은 다음날까지 끌고 가지 말라, 그대로 가져가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의도한 바는 분을 오래 품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마귀로 틈을 타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화를 내고, 그러면 마귀가 옆에서 훈수를 하고 그럽니다. 때려 부셔라, 자꾸 부추기거든요. 마귀의 소리를 따르다 보면, 어느 사이에 마귀의 종이 되어버리거든요. 엉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분한 일이 있어도, 죄를 짓는 데까지 나아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분노하게 되면 마귀가 기뻐합니다. 그리고 어느 사이에 내가 마귀의 노예가 되어버리기 쉬운 것입니다. 『존 스타트』는 분노에 관해 말하기를, “오늘날과 같은 세상에서는 기독교인이 더욱 분을 내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있습니다. 명백한 죄악 앞에서 우리는 그것을 참거나 동정하려 해서는 안 되고, 분개하여 의분을 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신다면, 그 백성도 역시 그것을 미워해야 합니다. 죄악이 하나님의 노하심을 일으킨다면, 우리에게 있어서는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주의 율법을 버린 악인들을 위하여 내가 맹렬한 노에 잡혔나이다.” 성경은 말씀했습니다. 사악한 죄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분노 이외에는 그 어떤 반응도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사랑으로 이룩된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인, 교회에 보내는 편지 속에서 그것도 화합관계와 관련된 단락 속에서 이와 같이 ”분 냄“을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특히 주목할 만합니다. 바울의 의도는 참된 화평이 무엇인지, 용납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세 번째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수고하여 주는 자가 되라.
28절에 “도적질 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게 하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그러기 위해서 먼저 선한 일을 하라 했습니다. 적극적으로 선한 일을 하면 도적질을 하지 않게 되지요. 또, 한 가지 제 손으로 일하라 했습니다. 도적질은 공짜 좋아하는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일 안하고, 한탕 하려고 도적질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땀 흘리지 아니하면, 문제가 생기는 것이니까 제 손으로 일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노동을 해보면 돈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돈 벌기가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남이 피땀 흘려 번 돈을 가로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도적질 하지 아니하려거든 제 손으로 일하라” 한 것입니다.
또, 하나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입니다.
너무도 아름다운 교훈입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나를 위해서 일한 것 중 얼마를 떼 내어 구제하는 것입니다. 목적이 구제를 위해서입니다. - 우리 교우들 아름답습니다. 지체가 어려울 때 서로 돕고 있습니다. 이렇게 일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아름답고, ‘신바람 나는’ 일이겠습니까? 『요한 웨슬레』의 명언이 있습니다. “많이 벌어라, 많이 저축하라, 많이 베풀라.” 열심히 벌어야 하겠습니다.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나 하나 먹고, 내 집안 먹으면 됐다. 이제 놀아도 된다.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열심히 벌어야 합니다. 이런 가치를 가지고 일하면, 하나님께서 물질의 축복을 풍성히 쏟아 부어주십니다. 「빌 게이츠」는 많이 벌어서, 많은 자선사업을 많이 합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살아가라 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 말에 대해서 우리에게 다시 거듭 가르치고 있습니다. 입으로 더러운 말을 하지 말고, 돌이켜 선한 말을 하라.
29절에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 되는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30절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구원의 날까지 네가 인 치심을 받았느니라.”
“더러운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사람이 말을 할 때에는 생각이 있어서 말을 하기도 하지만, 말을 하므로 생각이 생기기도 합니다. 이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더러운 말을 자꾸 하면, 생각이 더러워집니다. 행위도 더러워집니다. 그러니까 더러운 말 같은 것은 혹 떠오르더라도 딱 멈춰야 합니다. 더러운 말을 자꾸 하게 되면 입이 더러워지고, 생각이 더러워지고, 행위도 더러워집니다. 그래서 더러운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라고 합니다.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 되는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합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현자가 “지혜로운 사람이 두 제자에게 그릇을 하나씩 주면서 세상에 돌아다니다가 제일 악한 것이 있으면 무엇인가 찾아서 담아오라 하고, 또 한사람에게는 가장 선한 것이 무엇인지 찾아서 담아오너라.” 했습니다. 각각 같은 그릇을 주고, 두 사람을 내보냈습니다. 얼마 후 돌아온 것을 보니 두 사람의 상자 속에는 둘 다 혀가 들어있었습니다. 가장 악한 것도 혀요, 가장 선한 것도 혀란 것입니다. 여러분 , 말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은혜로운 말, 그것을 구사하면 죽은 사람이 살아나기도 합니다. 불치의 질병이 치료되기도 합니다. 낙심하고 좌절되어 있던 사람이 용기를 얻고 다시 일어서기도 합니다. 여러분, 아무쪼록 말할 때 덕을 세우고 은혜를 끼치세요. 엄청난 교훈입니다.
다섯 번째, 여기서 우리가 완전히 버리지 아니하면 안 될 6가지 좋지 못한 행위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31절에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 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악독”은 가혹하고 독기가 있어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말합니다.
“노함”은 악독에서 나오는 것으로 표면에 나타나는 노여움을 말합니다.
“분 냄”은 속에 불일 듯 일어나는 노여움입니다.
“떠드는 것”은 노여움이 밖으로 나타나 쟁론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며,
“훼방”은 떠드는 것의 결과로써 악의로 상대방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악의”는 남을 해치려는 마음으로 앞에 열거한 모든 죄악의 근원, 뿌리입니다.
이러한 죄악은 성령을 근심케 하고,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서 떠나게 하는 요인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들을 버리고, 겸손하고 온유하며, 사랑 안에서 오래 참아, 서로 용납하는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여섯 번째로 돌이켜 인자하게 하며 긍휼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라는 말로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32절에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영국의 『웰링톤』제독이 어떤 날 상습적으로 탈영한 병사를 앞에 놓고, 재판을 해서 사형선고를 내리게 됩니다. 원래 군법은 탈영하는 죄는 사형감입니다. 그러나 그를 훈계도 하고, 때려도 보고, 감옥에 넣기도 하고, 상담도 해보고, 달래도 보았는데, 또 탈영하고 또 탈영하는 것입니다. 끝도 없이 그래서 웰링톤은 끝없이 말을 안 들으니, “할 수 없다. 너를 사형시킬 수밖에 없다” 했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친구가 하는 말이 “제독님, 안 해본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용서하는 일을 안 해보았습니다.”하는 것입니다. “그렇구나.”하고 그는 과감하게 “용서한다.”하였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사형선고 받았던 그 병사가 그 때부터 결심하고 좋은 군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가장 큰 힘이 용서라는 것을 잊지 맙시다.
자, 오늘 본문 성경도 이렇게 결론을 맺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용서함이란, 은혜를 베푸는 것으로 하나님의 은혜 외에 인간은 용서받을 길이 없었고, 그 은혜를 받지 않고는, 참되게 남을 용서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계셔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는 은혜를 말합니다. 되돌려 말하면, 내가 용서 받았다 하는 마음으로 용서하라 이것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내가 남을 용서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용서를 구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가 용서를 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평론 받지 아니하려거든, 평론하지 말라.” “심판 받지 아니하려거든, 심판하지 말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용서 받았고, 앞으로도 용서 받아야 합니다. 결국 우리는 용서 받아야 할 사람들인데, 이제 누구를 정죄하겠습니까? 누구를 심판하겠습니까? 이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 사랑이 너무 크기에 내가 너를 사랑한다 하는 이것이 사랑입니다. 용서는 이유나 조건이 있을 수 없습니다. 내가 용서 받아야 될 사람이고, 이미 용서 받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용서받은 사람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도 남을 용서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 가지 권리 밖에 없습니다. 사랑할 권세, 용서할 권세. 우리는 누구도 심판할, 누구도 미워할, 권리가 없습니다. 이것을 잊지 맙시다.
여러분, 주기도문을 외우지 않습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해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어떤 사람은 주기도문을 외울 때 이 대목은 안 외운다고 합니다. 마음에 안 들거나, 걸려서··· 그러나, 이 기도가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