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4:1-3ㅣ김남수 목사님]
우리는 바울 사도가 다른 서신서 들과 마찬가지로 에베소서에서도 역시 앞부분은 교리에 관한 말씀으로 인간들의 마음 가운데 복음의 위대한 진리와 교리를 전해주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뒷부분은 실제적인 생활에 관한 말씀으로 성도들의 생활과 습관에 대하여 지시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기록하셨음을 봅니다. 이것이 바울 사도의 서신서 들의 중요한 구성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믿느냐 하는 신앙문제가 근본이요, 그 믿음이 바로 설 때, 그 믿음 을 가지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뒤에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리문제와 윤리의 문제를 언제든지 둘을 함께 취급하면서 전반부는 교리를 말씀하고, 후반부에서는 윤리를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의 총 주제는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인간이 하나 되고, 이웃과 이웃이 하나 되고… 특별히 내 속에 있는 두 마음, 이것이 믿음 가운데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 되게 하신 것, 그것을 지키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이다 그렇 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분열이 깊습니다. 그래서 나라와 나라가 싸우고, 민족과 민족이 더불어 싸우고, 요새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높은 자와 낮은 자, … 계속 싸우고 있습니다. 더욱이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속에 싸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뜻하는 바는 하나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1~3절은 모든 것을 총괄하는 아주 총론적이고 근본원리적인 말씀입니 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 되라고 하는 바울 사도의 총론적인 세 가지 권면의 말 씀을 읽게 됩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생활하라(1절) 다음은, 하나(일치)되는 방법을 지시하고(2절) 셋째는, 총 주제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3절)입니다.
Ⅰ.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생활
1절에 “그러므로 주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먼저, “주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지금 로마감옥에 죄수로 갇혀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갇히게 된 것을 계속 반복하는데, 이는 자신이 갇히게 된 것을 부 끄러워 하지 않고 있음을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그가 갇힌 것을 반복하여 말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가 그들에게 쓴 서신의 내용을 설득력 있는 입장에서 추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복음의 교훈을 위하여 고난을 받을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 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도 복음을 가치 있게 여기고, 진지한 경의를 표하며 충성스럽 게 지킬 것을 권면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된 한 죄수의 간곡한 권면을 읽을 수 있습니다. “너희는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하나님께서 너희를 어떤 자리로 부 르셨는지를 생각해보고,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합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 이름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하며,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만 한다하는 말씀입니다. “너희를 권면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이 말씀은 또한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 다는 확신을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란, 죄와 허물로 죽은 그들을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의 백성이 되도록 선택 받은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를 짊어지게 하시므로, 우리는 부르신 성령의 음성에 “예”하고 대답하여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원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부터 난 것이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닙 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예수그리스도가 구주이심을 깨닫게 하시고, 보혈의 공로로 정결함을 입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셨으니,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벧전 2:9에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합당하게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덕을 선전하는 것이요,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또한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성령의 영감을 받아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권면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이 무엇을 말할까요? 그것은 하나가 되어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성경에 요17:23에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들로 온전 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강력한 전도는 예수님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 서로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을 이웃에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 안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생활을 하는 가장 근원적인 생활은 “사랑으로 하나 되는 생활”입니다.
Ⅱ. 하나 되는(일치되는) 방법
2절에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통합하고” 하나 되기 위해서 오늘 본문 2절에서는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네 가지 덕을 읽게 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하나 되는 비결입니다. 하나가 되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이 지닐 최고의 덕 4가지를 바울은 성령의 영감을 받아 겸손, 온유, 인내,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첫째, 겸손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 되는 기독교인의 첫째 덕입니다.
겸손의 헬라말 타페이노프로소네(tapeinofrosuvnh)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 고 있습니다. 겸손이란 말은 진실이라는 말과 통합니다. 왜냐하면 교만할 이유가 하나도 없으니까요. 진실이 겸손이요, 겸손이 진실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타페이노프로소네는 기본적으로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자기에 대 한 지식, 자기지식에서 자유 하는 겸손입니다. 자기를 스스로 어떻게 평가 하느냐 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자기 자랑, 자기 우월감, 그리고 이기주의 이런 것을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자유 할 때 그것이 겸손입니다. 자기 지식으로부터 자유 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걸 고집하고 싶거든요. 내가 꼭 옳은 것입니다. 내가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에는 절대로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내 마음을 완전히 비워야 됩니다. 나를 비워야 겸손할 수 있습니다.
또 진실한 겸손은 자기 기준에 메이지 않습니다. 가끔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무슨 일 날 때, 잘못되면 우리는 흔히 “인간인고로….”합니다. “인간인고로” 해놓고는 일을 일으켜도 정당화하고, 저렇게도 합리화하려고 듭니다 마는 영적으로 어두워 자신의 죄도 모르는 상태에 있을 때가 있습니다. 지난날의 삶을 조용히 하나님 앞에서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어디에다 기준을 맞추어야 하느냐? 그리스도인의 겸손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겸손의 표준을 그리스도께 두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봅시다. 그리고 나를 봅시다. 그러면 나는 확실히 교만한 것입니다.
항상 그리스도에게 표준을 두고 그의 겸손, 그의 인간성, 그의 마음가짐을 보고 다 음에 나를 보십시오. 거기에 비추어 보면, 나는 너무 교만합니다. 이래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 표준을 둔, 그리스도의 생애에 비추어 본 나 자 신, 거기서 겸손이 무엇인가를 찾습니다.
나이 많은 한 수도사에게 어떤 사람이 찾아가서 “기독교인의 으뜸가는 덕목이 겸 손이라고 듣고 있는데, 선생님 겸손이 무엇입니까?”하고 묻습니다. 수도사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네 이웃이 네게 잘못한 것이 있느냐? 범죄 한 것이 있느냐? 그가 네게 용서를 빌 기전에 너는 저를 용서하라 이것이 겸손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용서를 빌면 용서를 하겠다, 빈 다음에 용서를 하겠다. 합니다. 이것이 아닙니다. 내게 잘못한 그 사람이 용서를 빌기 전에, 벌써 나는 다 용서합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그런고로 그리스도인의 겸손의 표준은 항상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의 겸손입니다. 빌 2:5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니”
그리고 하늘 보좌를 내놓고 땅에 오신 분, 종의 형체를 입어 십자가에 돌아가신 분, 거기서 그리스도의 겸손을 확실하게 설명합니다. 이제 주님을 바라보면서 나의 겸손을 점검해 봅시다. 이제 그 겸손만이 하나 되게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진정으로 겸손하고 보면, 하나 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겸손하면 되는데 이걸 못합니다. 자기 속에서 하나 되지 못하고, 가장 가까운 사람이나 이웃과도 하나가 될 수 없 습니다. 양육의 열매가 없습니다. 진실한 겸손이 온전히 하나 되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 또 하나, 하나 되는 덕은 온유라고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온유란 헬라말 프라우테스(prau?th")는 특별한 말입니다. 하나님을 가리켜 겸손한 하나님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온유란 말은 사람에게, 동물에게, 심지어 하나님께, 마저 쓰는 특별한 말입니다. 헬라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온유를 두 가지로 말했습니다. 먼저, 온유란 것은 두 극단을 피하는 것이다 했습니다. 그래, 극단적인 것은 온유가 아닙니다. 어느 쪽으로든지 극단적으로 행하는 것은 온유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중도를 취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 온유라는 말은 비유해서 말하기를 잘 길들여진 동물을 말하는 것이라 했 습니다. 잘 길들여진 동물. 아주 사나운 동물도 가져다가 잘 훈련시키면 온유해지지 않습 니까? 소 같은 동물도 잘 길들여졌기 때문에 얼마나 좋습니까? 잘 길들여진 동물, 이것이 온유입니다.
우리 인간으로 말하면, 우리의 성품이 진리로 잘 길들여진 것, 이것이 온유입니다. 이것이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신앙을 쌓고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훈련을 받아 온유해집니다. 어려운 일을 당해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온유한 것입니다. 어떤 대로든지 치우치지 않습니다. 이것이 온유입니다.
온유라고 하면, 빼놓을 수 없는 한 사람이 있는데, 바로 모세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온 천하에 모세와 같이 온유한 자가 없느니라.”하셨습니다. 모세는 당을 지어 욕을 하든, 비난을 하고 대적을 하던 잘 참았습니다. 그러자 결국 하나님께서 비난하고 대적하는 그들을 벌주고, 모세의 편을 들어 주 셨습니다. 이 일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루아침에 된 것입니까? 오랜 신앙생활 속에서 훈련되고 훈련되어 이렇게 온유한 성품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노력하지만 아직 온유가 부족한 사람입니다. 어떤 수도사가 환상을 보았는데, 천국에서 가장 크고 밝은 등이 온유의 등 이었다 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등처럼 온유함이 있어야 하나가 됩니다. 부딪힐 일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하나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셋째로 하나가 되는 덕은 바울이 오래 참음이라 했습니다.
헬라말로 마크로뒤미아(makroqumiva)라고 하는 이 오래 참음은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어떤 약속이나 보상을 바라고, 그 약속을 얻을 때까지 어떤 고난도 잘 참고 견디 는 것입니다. 참아도 오래 참습니다. 상대를 보고 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고 오래 참는 것입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하니까 잘 참습니다. 특별히 인간관계에서 잘 참습니다. 성경에 유명한 이야기가 있지요. 예수그리스도께서 사울을 오래 참아 주셨습니다. 그가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여 다메섹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갈 때 에 다메섹 도상에서 길을 딱 막으시고, 바울에게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당 장 그 자리에서 벼락을 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바울을 참아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늘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그가 나를 사랑하셨다.” 오래 참아주셨습니다.
우리는 사람에 대해서, 인간관계에 대해서, 또는 환경변화에 대해서 참아야 하는데, 그 참음의 뿌리가 근본정신이 어디에 있는고 하니, 하나님 앞에 선 모습을 생각하 는 것입니다. 고난과 대적을 오래 참을 때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네 번째 하나 되는 덕은 사랑입니다.
헬라어로 성경에 많이 나타나는 사랑은 아가페가 있고, 에로스라는 것이 있습니다. 에로스는 나를 중심해서 잡아당기는 동경적 사랑이요, 성취적 사랑입니다. 그리고 필리아라는 사랑이 있습니다. 이것은 친구간의 사랑입니다. 또, 스톨게라는 사랑이 있습니다. 이것은 부모 자식 간에 핏줄이 당기는 사랑입니다. 이렇게 아가페, 에로스, 필리아, 스톨게 가운데 오늘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아가페 입니다. 아가페의 뿌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있고,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바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면, 아가페가 무 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아가페 속에서 온전히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Ⅲ. 하나 된 것을 힘써 지키라
3절에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이것은 “성령이 주신 일치” 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 되는 자리는 마음과 영혼 가운데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 됨이란 생각의 일치에 있는 것이 아니요, 예배의 형식과 모 양이 하나 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한 마음과 한 영혼으로 합하는데 있는 것입니 다. 이러한 마음과 사랑의 일치야말로 하나님의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심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일치는 성령에 의해 와지는 것이며, 우리는 이 일치됨을 보존하도록 우리가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힘써 지킴”이란 단어는 복음적 용어입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하나가 되게 하지 못하는 것을 자신을 살피므로 성령의 깨우 침을 받아 던져버리고, 주안에서 하나 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또한 본문에 “평안의 매는 줄”이 있습니다. 이 말은 평화가 사람들을 하나가 되게 하고, 서로서로 친교를 갖고 살도록 매는 줄이란 뜻의 말입니다. 평화로운 성격과 행동은 그리스도인을 하나가 되게 합니다. 반면에 불일치와 논쟁은 그들의 마음과 사랑의 결속을 헤치고 분열을 초래합니다.
하나가 되게 하신 것, 하나님께서 근본적으로 본질적으로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현실 속에서 지켜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이미 하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가 아닌 줄을 착각하고 있거든요. 그런고로 깨달아보라. 하나라는 것을 알고, 하나 되라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하나가 아닙니까?
그런데 동양문화는 예로부터 유교의 영향을 받아 양반이니 상놈이니 합니다. 뼈대가 있는 집안인데 합니다. 한국 사람이 그 사람이 그 사람이지 뼈대는 무슨. 우스운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문어하고 멸치하고 싸웠답니다. 멸치가 하는 말이 “비록 나는 작지만, 이놈아. 나는 뼈대가 있다.”하더랍니다. 문어는 뼈대가 없잖습니까? 뼈대는 무슨 뼈대입니까? 옛날에 양반도 돈 주고 샀습니다. 그런 것입니다. 양반, 뼈대, 가문…. 세상에 어리석은 소리거든요. 이런 것을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가 못되는 것입니다.
꼭 같다는 것,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남녀가 다르다 - 그래서 남녀는 분명히 다르다 합니다. 그러나 본래적으로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인권이 같지요, 나고 죽는 것이 같지요, 감정이 같지요, 지식이 같지요…. 다른 것이 뭐 있습니까? 조금 달라요, 조금. 그러나 천국 가면 모두 다 똑같이 남녀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남자나 여자나 다 똑같이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것을 알고 인정하면, “같은 것이 전부다”라고 생각하면 벌써 하나가 되는 것입니 다.
그러니까 하나가 되려면 겸손하고, 하나가 되려면 온유하고, 오래 참고, 사랑하고, - 이럴 때에 하나 됨을 지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완전히 지킬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 되려고 하는 쓸데없는 노력을 많이 합니다.
하나 되라고 외치기만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하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 되는 것은 바로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네 가지 덕을 지켜갈 때 원리적으로, 근본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이루신, 이미 이루어진 하나 됨을 지켜가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