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3:12-16ㅣ김남수 목사]
오늘 본문을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을 위하여 쫓아가는
첫째, 정신자세와
둘째, 그의 분투노력하는 모습과 그리고
셋째, 그의 목표(푯대)와
넷째, 상급으로 나누어 오늘 본문의 내용을 같이 상고하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같이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정신자세
12절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적 완전을 향한 바울의 강한 열망과 분투노력이 상징적으로 육상경주에 비유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포착하기 위해서는 모든 면에서 경주의 기초적인 배경을 잘 이해하고 그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제 경주 코스와 관중석에 갖추어진 고대 희랍의 경주 장을 머릿속에 그려 봅시다. 아테네 있는 경주 코스의 길이는 옛 로마 마일로 1/8 마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길이로 계산하면 대략 182m가 됩니다. 이러한 경주의 규칙은 반대편에 있는 입구까지 달려서 먼저 도착하거나, 아니면 그곳까지 한 번 또는 두 번까지 왕복하여 먼저 도착하는 자가 승리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경주 장 입구 가까이에는 경주 선수들이 출발하는 출발선이 있었는데 각 선수들이 설 위치에는 돌로 된 발판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몇 몇 고대 경주 장에는 그 트랙의 양 끝에 있는 출발점에 이러한 돌로 된 발판들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발판들은 경주자들이 빠른 속도로 힘차게 출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경주 선수들은 이 발판에 서서 몸을 앞으로 구부린 채로 한 손을 가볍게 그 발판에 대고서 그들 앞에 뻗쳐 있는 줄이 내려지기를 기다렸습니다. 이 출발 신호에 따라서 그들은 앞으로 달려 나갔습니다.
“이 경주자가 과연 이길 것인가?” 하고 질문한다면, “주로 그의 정신자세 여하에 달려 있다” 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만일 그가 스스로 “내가 아무리 무슨 짓을 한다 해도 나는 확실한 승리자이다” 하고 과신한다면, 그는 틀림없이 토끼와 거북이 우화에 나오는 토끼의 실패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토끼가 낮잠을 자는 동안 거북이는 쉬지 않고 목표를 향하여 기어갔습니다. 잠을 깨어보니 때는 이미 늦어서 그의 상대자인 거북이가 먼저 목표점에 도달해 있던 것입니다.
영적인 경주에 있어서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인 경주에서도 역시 그 영적 경주자의 정신자세 여하에 승패가 달려 있습니다. 바울은 그가 이 경주에서 이미 승리하였다는 생각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내가 이미 얻었다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함도 아니라” 고 합니다. 바울은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 는 교리를 굳게 신봉하는 자였습니다. 비록 그가 이미 주님을 섬기는 일에 모든 것을 희생하였으나 그는 한 가지 사실 곧 죄로 죽은 자 가운데서 아직 그가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완전한 부활에 이르지 못하였다는 사실에 확신하였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는 아직 완전하게 되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확신하였습니다. 원리에 있어서는 완전하다! 그러나 완전히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아직도 멀었다! 죄와 두려움과 의심에 대한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더구나 신자들은 현생애에서 완전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 어디서나 발견되는 성경의 교훈입니다. 바울은 그가 종종 하는 대로 부정문 다음에 강한 긍정문으로 강조하여 말하기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것을 잡으려고 쫓아가노라 합니다. 바울은 뒤따라가서 잡을 목적으로 쫓아가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 잡힌바 되었습니다.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에 부활 승천하신 구주께서 그에게 분명한 과업을 맡기셨습니다. 이 사실, 곧 그 자신을 굳게 잡고 있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용기와 힘을 얻은 사도는 이제 그를 완전히 소유하시도록 그의 앞에 있는 목표를 향하여 줄기차게 나아갑니다.
그는 계속하여 13절에 “형제들아 나는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라고 말합니다. 지금 사도가 불완전한 것에 대한 고백을 불필요하게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이제 무엇을 더 첨가하고 있습니다. 다음에 나오는 문장을 소개하여 주고 있는 서두의 호칭 - 형제들아! 는 사도가 깊이 감동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전보다 훨씬 분명하게 그는 지금 빌립보교회가 자기들은 이미 완전을 붙잡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 인하여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표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오류를 범한 자들은 십중팔구 그들의 그릇된 견해대로 그들이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유대 주의적 의식들을 철저히 지켜왔다는 사실에 관한 이 선언을 기초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것들은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 따위 케케묵은 의식들에 얽매인 율법을 바로 지키는 일은 나에게 유익을 주는 대신 해가 될 뿐이다. 더구나 그리스도 한 분만을 믿는 신자인 나로서도 동일한 목표, 곧 영적 완전의 목표에는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다. 누가 뭐라고 하던 내가 아직 그것을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한다.“ 고 함으로써 그들의 그릇된 주장을 일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이 나태하다거나 낙심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는 죄를 묵인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경주자로서 그는 그의 분투노력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둘째, 분투노력
바울은 말하기를 “오직 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경주자는 “오직 하나의 목적, 곧 상을 얻기 위하여 목표점을 향해서 달리는 일에 끈질기게 집착합니다.” 경주자는 그의 경주코스에서 그를 다른 길로 벗어나게 하는 그 어떤 것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의 목표점은 확고부동하게 정해져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에게 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서신들을 읽은 사람들은 바울이 개종한 이후로 그의 세계를 특징지어 주는 확고부동한 통일성에 놀라게 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완전하게 되는 데에 목표를 두었습니다. 그는 지속적인 확신에서만 아니라, 사랑의 헌신에서도 완전하게 되기를 바랐습니다. “나를 거룩한 열정으로 가득 채우사 주님의 천사들이 사랑하듯이 내게 주님을 사랑하도록 가르치소서.” 이러한 정신력의 집중은 절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매일 매일의 생활에 있어서 정신이 산란해지는 것은 종종 비참해지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여행에서 스쳐가는 광경에 자동차 운전자가 정신이 산란해지면 그 결과 심각한 사고가 일어날 것이 뻔합니다. 이와 같이 영적 세계에 있어서도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에 이끌려 한 눈을 팔면, 복음의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사고가 일어나게 되고 맙니다. 스포츠나 옷이나 육체적인 매력 등에 지나친 관심을 쏟는 것은 경주자가 그 목표점에 도달하는 일을 막습니다. 참으로 한 눈 팔지 말고 전심전력할 일입니다. 동시에 그것은 마음속에서 역사하시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이것은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하는 기도에 대한 응답입니다.
이러한 정신력의 집중은 몇 가지 요건을 필요로 합니다.
첫째로 경주자가 이미 달려 온 길을 잊어버리는 일입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합니다. 경주자가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는 그가 달리는 중에 만일 뒤를 돌아보는 경우, 그의 달리는 속도가 늦어지고 방향을 잃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는 경주에서 지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경주중에 뒤를 돌아보는 것은 언제나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영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인 경주에서도 뒤를 돌아보는 것은 금물입니다. 롯의 처를 생각하십시오. 이제 바울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린다고 말할 때 그는 단순히 소극적인 망각의 태도를 뜻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뒤에 있는 것은 적극적으로 잊어버린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과거에 그가 쌓은 공로에 대한 생각이 떠오를 때에 그는 즉시로 그의 마음속에서 쫓아내 버렸습니다. 이것은 끊임없이 과거에 이루어 놓은 일들을 의식적으로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정신력의 집중에 이어서 두 번째로 빼놓을 수없는 요건은 동요됨이 없이 줄기찬 전진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바울은 계속하여 말하기를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합니다. 그것은 경주자가 푯대를 향하여 마치 그것을 붙잡으려는 듯이 손을 앞으로 내어 뻗치고 온갖 힘을 다하여 달려가는 모습을 그려 주고 있습니다. 영적인 경주라고 해서 동요됨이 없는 줄기찬 전진이 덜 요구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 지상에서 윤리적이며 영적인 완전에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것이 시실이라면, 그처럼 완전에 이루기 위해 애쓸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온전히 도달할 수 없는 목표를 향하여 사도가 그처럼 끊임없이 애쓰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 대답은 두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먼저는, 비록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 목표에 도달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향하여서 전진할 수도 있습니다. 윤리적이며 영적인 일에 관한 완전의 일은 전부 다냐 아니면 전혀 아무것도 아니냐 하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바울 자신이 어디서나 가르치고 있는 바와 같이 성화에는 점차적인 전진의 단계가 있습니다. 사실상 그러한 전진, 그러한 향상은 참된 신앙의 씨앗이 마음속에 뿌려졌을 때 일어나는 정상적인 현상으로 간주되어야만 합니다.
다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간주되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이러한 영적 완전은 실제로 그것을 얻기 위하여 힘쓰는 자들에게만 허락됩니다. 상급은 이 목표를 향하여 쫓아가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따라서 완전을 가져다주는 영적인 분투노력은 정신 집중, 잊어버림, 전진을 요지로 하고 있습니다. 목표를 향하여 쫒아간다는 말은 이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셋째, 목표(푯대)
14절에서 바울은 계속하여 “푯대를 향하여 … 쫓아가노라” 고 말합니다. 어원에 의하면 푯대로 번역된 말은 사람이 그 눈을 고정시키는 목표 그 지점을 의미합니다. 경주자가 다 달려가도록 트랙의 골인 지점에 있는 목표 지점을 쳐다보는 것은 큰 힘이 솟는 일입니다. 그는 줄곧 그 푯대를 향하여 곧 그 푯대를 향해 바라보는 그 눈의 시선에 일치하여 달립니다.
영적, 경주에 있어서 그 푯대는 그리스도, 곧 그 안에서 얻는 윤리적이며 완전입니다. 사도는 죄에서 완전 벗어나기를 열망하였습니다.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증인이 되어 아무쪼록 그 중에 몇을 구원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을 열렬히 추구하였습니다.
넷째, 상급
경주자가 상급을 잊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하고 푯대를 향하여 쫒아가는 목적을 밝힙니다. 경주를 마친 후에 본부석으로부터 호명을 받은 승리자는 상을 받기 위하여 시상대에 올라서게 됩니다. 월계관과 아울러 500드라크마의 상급도 함께 수여했습니다. 거기에다 그에게는 관비로 식사가 제공되었고, 극장에서는 맨 앞줄에 앉는 특권의 부여되었습니다.
사도가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쫒아가노라고 말할 때, 아마도 그는 어느 정도 이러한 사실들을 그의 염두에 두고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기본적인 상황과 영적인 의미는 여기에 완전히 부합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양자의 경우에 있어서 경주를 마친 후에 상이 수여되는 것은 동일하나, 시상자에 대한 위에서 부르신 부름에 대래서는 양자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전자, 세상의 경주에 있어서는 경주를 다 마친 후 판가름이 난 승리자를 시상대로 나오도록 호명하나, 후자, 영적인 경주에 있어서는 경주를 시작할 때부터 시상자를 호명하십니다. 바울은 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을 그가 개종할 때 받았습니다.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바울의 마음속에는 효과적인 복음의 부르심에 메아리치고 있었습니다. 이 부르심은 하늘로 향하게 하신 부르심이요, 거룩한 생활에로의 부르심 곧 거룩한 부르심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계속해서 바울을 부르시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상은 그 부름에 순응하여 행한 자에게 수여되는데, 그 경주가 끝나고 완전한 승리를 했을 때 시상됩니다. 그 때에 다른 모든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바울도 역시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거하게 될 것입니다. 푯대와 상급 사이에는 진정한 차이가 있는가? 어떤 면에서 양자는 동일합니다. 양자 모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완전을 가리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푯대와 상급은 그 동일한 다른 양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이 완전한 푯대라고 할 때에는 인간의 노력의 대상으로서 본 것입니다. 한편, 이 완전을 상급이라고 할 때에는 그것을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선물로서 본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 있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자에게 영생을 나눠주는 것입니다. 그는 완전을 얻고자 애쓰는 자에게 그것을 주십니다. 이 믿음과 노력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적으로 하나님 은혜에 의존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와 그 안에 있는 구원을 받아들여야 할 자는 우리입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 힘써야 할 자는 바로 우리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대신 믿어주시거나 힘써 주시지는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다음, 푯대는 현재 달리고 있는 일에 주의를 집중시키나, 상급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시작될 영광에 주의를 집중시킵니다. 이와 같이 죄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고 이 일에 완전히 헌신하게 하는 것은 푯대에 관한 것입니다. 한편 구원 얻은 성도들이 이 모든 일을 성취한 날 이후로 영원히 계속될 완전한 교제는 상급에 관계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우리는 바울이 본 절에서 직접 구별하듯이 푯대와 상급사이를 구별하는 것이 옳습니다.
바울은 지금 이 영광스러운 상급 - 곧 그리스도와 모든 성도들과 함께 놀랍게 회복된 새 우주에서 완전한 지혜와 거룩과 기쁨과 평화 복된 교제로 모두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사는 영생의 축복들-을 염두에 두고 푯대를 향하여 쫒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모두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사는 영생의 축복들을 염두에 두고 푯대를 향하여 뒤돌아보지 말고 상급을 바라보며 쫒아 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