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 1:6-22 | 최병희 목사]
인생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선택의 연속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선택 3가지를 해야 합니다. 첫째는 배우자에 대한 선택이고, 둘째는 직업에 대한 선택이고, 셋째는 신앙에 대한 선택입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느냐?에 따라서 행복한 인생이 될 수 있고 불행한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과 함께 사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떤 직업을 선택하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사람이 결혼을 했으면 가족의 살림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직업 선택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결혼과 직업에 대한 선택보다도 더 중요한 선택이 있는데 그것은 신앙에 대한 선택입니다. 결혼과 직업은 이 땅에서의 운명만 결정하지만 신앙은 영원한 운명을 좌우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세 여인의 선택을 보면서 인생길에 주님 기뻐하는 올바른 선택만 하시길 축원합니다.
첫번째, 나오미의 선택입니다.
남편이 죽은 그 여인들에게 어느 날 복음의 기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다시 긍휼을 베풀어주셔서 베들레헴에 먹을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며느리들을 데리고 베들레헴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돌아오다가 생각을 해보니 안되겠는 겁니다. 그래서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그냥 고향 땅 모압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며느리들이 반대를 하자 나오미는 1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1:11 돌아가라 내 딸들아! 내 뱃속에 아들들이 들어 있어서 그것들이 너희 남편이라도 될 수 있다는 말이냐? 12 돌아가라 제발 돌아가라! 재혼을 하기에도 내가 너무 늙었다. 설사, 오늘 밤 내가 남편을 맞아들여 아들들을 낳게 된다고 하더라도 13 너희가 그 아들들이 클 때까지 기다릴 셈이냐? 그때까지 재혼도 하지 않고 홀로들 지내겠다는 말이냐? 아서라 내 딸들아. 너희들 처지를 생각하니 내 마음이 너무나 괴롭구나! 이 일은 하나님께서 나를 치신 것이 분명하다. 베들레헴으로 함께 가도 소용없다 돌아가라!!"
며느리들을 데리고 길을 떠났지만 이 젊은 며느리들의 장래를 생각해 보니 데려가서는 안된다는 판단이 선 것입니다. 그래서 형이 죽으면 동생이 대신 형수의 남편이 되어 대를 이어가는 고엘제도를 예로 들어가며 반대를 하는 것입니다.
이 나오미의 선택은 인간적으로는 참 좋은 선택입니다. 돌아가라! 고 했을 때 며느리들이 소리 높여 울었다고 한 것을 보면 아마도 나오미가 자신의 며느리를 고향 땅에 데리고 가면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할 것 같아서 이기적으로 돌아가라고 한것 같지는 않습니다. 며느리들은 자신을 사랑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느껴져서 그렇게 이별을 슬퍼하며 울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선택은 신앙적으로는 대단히 잘못된 선택입니다. 왜냐하면 고향 땅에 머문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버리고 옛날 우상을 섬기던 신앙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15절을 보시면 그의 백성과 그의 무엇들에게 돌아갔다고 합니까? '그의 신들'입니다.
오늘날 나오미와 같은 육신적인 선택을 하는 부모가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순간의 선택이 영원을 좌우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순간 육신의 선택을 함으로 영혼이 잘못되어 영원히 눈물 흘리며 보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육신을 위한 선택을 하지 말고 영혼을 위한 선택을 하시길 바랍니다.
두번째는 오르바의 선택이고 세번째는 룻의 선택입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가면 다시 재가할 희망도 없어집니다. 더군다나 이방 여인이라 유다 베들레헴에 가면 엄청난 조롱과 핍박이 예상되는 선택입니다. 오늘날도 한번 보십시오. 외국에서 온 며느리가 남편이 일찍 죽고 시어머니와 단둘이서 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들이 남편 잡아먹은 년이라고 손가락질 할 것입니다. 이방땅 모압에서 왔으니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그렇다!고 괄시를 할 것입니다. 어쩌면 평생을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왕따당하고 살아야 합니다. 어머니 나오미도 봉양해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죽으면 혼자 살아가야 합니다. 남편도 없는 그 이방 땅에서 말입니다.
정말 미친 선택입니다. 룻은 왜 이런 미친 선택을 한 것입니까? 신앙적인 선택을 한 것입니다. 인간적인 정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자기가 만난 그 하나님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그런 어려운 결정을 한 것입니다. 14절을 보십니다. 14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이 ‘붙좇았다’라는 단어는 전인적으로 붙드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붙드는 결단, 한번 붙들면 절대로 놓지 않겠다는 의지적인 결단입니다.
"15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갔으니 너도 동서처럼 돌아가라"고 하는 나오미의 권면에 룻은 어떻게 고백합니까? “16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그동안 인생의 길에서 어떻게 선택하며 살아오셨습니까? 내 편리를 따라 선택하셨습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선택하셨습니까? 내 육신의 쾌락과 기쁨을 우선하는 선택을 하셨습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택을 우선하셨습니까?
세상은 오늘도 우리에게 "오르바를 봐라.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고 우리를 유혹합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우리는 끊임없는 선택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직면하는 모든 상황과 사건 속에서 정말 후회함이 없는 그리스도인다운 선택을 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룻은 자신의 선택이 얼마나 위대한 선택이었는지 생전에는 미처 몰랐습니다. 룻이 보아스를 통해 낳은 아들 오벳은 다윗왕의 아버지 이새를 낳았습니다. 모압이라고 하는 이방여인, 그것도 첫 남편이 죽은 과부였던 그 여인이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의 올바른 선택을 했더니 결국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는 영광을 맛보았던 것입니다.
키에르 케고르는 “신앙은 이것이냐? 저것이냐? 의 선택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칼 바르트는 “신앙에는 완충지대가 없다. 사망이냐? 생명이냐? 의 선택일 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인생의 모든 선택마다 상주실 하나님과 영원한 천국의 삶을 바라보고 하나님 기뻐하시는 선택을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신앙선택 정말 잘했네요 ㅎㅎ
하나님께서 선택하셨는데 그 부르심에 응했으니 잘했다고 나에게도 칭찬~^^
앞으로의 선택도
주님을 붙좇아 하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