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5:1-11ㅣ김남수 목사]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아주 좋은 이름입니다. 아나니아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뜻이고, 삽비라는 “아름다움”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은혜롭지도 못하고, 아름답지도 않았습니다. 이름만 좋았을 뿐, 은혜로움도 아름다움도 없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은 아무리 생각해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 유감스런 사건입니다. 성령 충만한 초대교회에 왜 이런 일이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타락한 교회, 세속화된 교회라면 또 모르겠습니다마는 초대교회는 성령 충만한 유무상통하는 은혜가 넘치는 교회가 아닙니까? 그런데 왜 이와 같은 일이 있었습니까?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 부부가 세 시간 사이에 차례로 베드로 앞에 엎드러져 죽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들이 정말 죽을죄를 지었느냐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절반이다 바쳤으면 됐지, 이것이 죽을죄가 되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돈 좋아하고, 재물 좋아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 소유의 절반이나 바쳤으면 많이 바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 두 사람은 절반을 바치고도 저주를 받아 죽었습니다. 두고두고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하나님 앞에 온 생을 바쳐 희생한다는 사람, 헌금한다는 사람은 오늘 본문말씀을 깊이 이해하고, 이 말씀에 담긴 경고와 깊은 계시적 의미를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자신의 소유를 판값의 얼마를 감추었습니다. 1, 2 절에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여기서 ‘감추다’의 헬라어의 의미는 ‘자기 몫을 떼어 놓다.’ ‘자기 몫을 챙겼다.’라는 뜻입니다. 바치고자 했으면 먼저 다 바쳤어야 했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자기 몫을 먼저 떼어놓았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자기 몫을 떼어 놓는 행위, 바로 이것이 감추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은 어느 점에서 계시적 사건입니다.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하여 우리 모두를 향하여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또한 이것은 대표적 사건입니다. 이런 사건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이 부분만을 볼 때는 불행한 일입니다마는,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통하여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표적 사건입니다. 이러 일들을 향한 경고적 대표적 사건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중요한 교훈입니다.
교회는 결코 영적인 낙원이 아닙니다. 우리는 교회라고 하면 거룩하고, 다 은혜롭고, 다 진실하다고 생각합니다마는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상교회는 이렇게 완전하다거나 거룩한 성역이 아닌 것입니다. 흔히 우리가 교회 안에는 아무 문제도 없을 것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무슨 잘못된 일이라도 생기면 크게 실망합니다만 그럴 것 없습니다. 그것이 교회의 본모습입니다. 교회는 영적 전쟁마당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악마와 더불어 싸우는, 죄와 더불어 싸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영적낙원이거나 성역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이 일어 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교회는 배신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사도 베드로는 3절에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라고 말씀했습니다. 사탄이 네 마음속에 가득하여, 교회 안에 사단의 역사에 들어 와 있다고 말씀합니다.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12제자 가운데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가룟 유다에게도 사단이 들어갔습니다. 요13:2에 보면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라고 말씀했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팔았기 때문에, 초대교회가 얼마나 많은 시험을 당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결국 배신자 아나니아 부부와, 가롯 유다는 배반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결국 배반한 자신들이 하나님께 버림당하여 죽임 당했습니다. 배신은 무서운 죄입니다. 그런데도 교회 안에는 배신자가 있을 수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누구나 가룟 유다가 될 수 있고,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특별히 열심히 믿는 사람, 교회를 위해 일을 많이 한다는 사람들이 오히려 배신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깨어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적으로 잘못된 줄 알면서도 “그럴 분이 아닌데”합니다. 오히려 오래 믿고 열심히 봉사하는 것 같으나 그 속에는 이미 사단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마귀가 들어 가 역사하고 있었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대로 사단이 네 마음속에 가득하여 그만 시험에 빠지고 만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시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두려운 말씀입니다. 자신 안에 배신의 싹이 트고 있다면, 회개하고 그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배신하여 그 꿈을 이루고 잘 된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결국은 모두 다 망했습니다. 그러나 사단이 들어가면 자기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며, 배신의 싹이 돋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또한 선한 초대교회에도 어두운 면이 있었습니다. 행4:36-37을 보면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바나바라고 하는 평소 존경 받는 사람이 밭을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 것 같습니까? 많은 존경을 한 몸에 받았을 것입니다. 저렇게 큰돈을 바치다니, 저렇게 귀한 일을 하다니, 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우러러 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선한 일로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이 바로 그것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은 하나님께서 교회의 거룩함을 지키기 위하여 있어진 사건이라는 데에 교훈이 있습니다. 교회는 위선을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이런 시험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을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는 교훈이 이 사건에 담겨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의 거룩함을 지키기 위하여 교회 설립 벽두에 이 같은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통하여 6가지 문제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생각할 것은 이들이 얼마나 감추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남의 것을 훔친 것이 아닙니다. 제 것을 훔친 것입니다. 도둑질치고는 참 이상한 도둑질입니다. 제 물건을 가지고 시험 당하는 것입니다. 남의 물건을 훔쳐 간 것이 아닙니다. 내 물건 가지고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므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내 물건 가지고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므로 어떤 의미에서 도둑질하는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둘째로 생각할 문제는 탐욕입니다. 탐심입니다.
탐심이 커져서 이것이 어느 한계에 도달하면 질투가 됩니다. 무엇을 가지고 싶은데, 결국 가지지 못하게 될 때에 우리는 질투하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탐심을 극복해야 합니다. 욕심과 시기 질투를 마음에 품고 예수 믿으면 결국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선한 일을 해도 시험에 빠집니다. 남하는 선행을 시기합니다. 내가 하는 선행을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다 탐심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의 소행입니다. 이런 사람은 무엇 하나 해도 제대로 할 수 없고 아무 열매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남이 못하기만을 바랍니다. 그래서 시험 치는 날이면, 어떤 학생은 공부 잘하는 친구가 감기에 걸렸으면 좋겠다. 심지어는 오다가 차 사고가 났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합니다. 이런 못된 심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자신이 망조가 들 징조인 것입니다. 사람이 시기 질투 정욕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면 무엇을 해도 말썽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의로운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문제입니다. 탐욕이 문제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 탐욕에 대하여 아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소유를 팔았습니다. 처음에는 다 바칠 마음으로 판 것 같습니다. 좋은 마음으로 자신들의 소유를 팔아서 바나바처럼 바치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돈을 한 움큼 손에 쥐고 보니 그 마음이 확 바뀝니다. “이것 다 바쳐?” “이것을 벌려면 내가 일생토록 일해야 하는데” 하는 생각에 반을 떼어 놓고 바치게 됩니다. 그들은 땅 값의 반만 가지고 사도들 앞에 나갑니다. 정 그렇다면 처음부터 “이것이 반입니다”라고 정직하게 말하고 바쳤으면 좋았겠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다 바치는 것처럼 말했습니다. 반만 바치면서 말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미 내 몫은 떼어 놓았습니다.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팔아 놓고는 내 몫은 먼저 챙겼습니다. 그리고는 다 바치는 것처럼 했습니다. 결국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재물에 대한 욕심을 이기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4절에“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더냐? 팔아도 되고 안 팔아도 되는데, 누가 팔라고 그러더냐? 안 팔면 그만이지, 왜 팔면서 시험에 빠지느냐 하는 말씀입니다. 어째서 여기에 인색한 마음, 아까운 마음이 따랐느냐 하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잘못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탐심 때문입니다. 욕심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생각할 문제는 위선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돈으로 거룩한 명예를 사려고 했습니다. 바치기는 만만 바치면서, 다 바쳤다는 칭찬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바치기는 하나님께 바친다고 하면서, 칭찬은 사람들로부터 받으려고 했습니다. 결국 그들이 마음을 쓰는 것은 하나님도 아니요, 그리스도도 아니요, 성령 하나님도 아니라, 오로지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일해야 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하나님의 일을 빙자해서 사람 앞에 칭찬을 받으려 했습니다. 그 근본 동기는 자기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있지 않았습니다. 자기 자신이 목적이었지, 하나님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일 하는 것을 수단으로 삼았을 뿐, 그 목적과 동기는 자기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이처럼 큰 죄는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도둑질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큰 죄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우상화하는 것은 참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정면으로 침해하고 들어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죄는 용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이 죄의 무서움을 깨닫지 못하고, 위선하면서 죄를 짓지만,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이런 위선의 기운이 속에 싹트고 있다면, 이 시간 빨리 돌이키십시오. 그 싹을 가차 없이 빼어 버리십시오. 4월 5일 초청 전도집회 때도, 진실한 마음으로 사람들의 영혼을 사랑하여 구원받으면 그들이 교회에 나오고, 하나님의 나라를 부흥시킬 목적으로 구원받은 후 가까운 지역에 사는 돌볼 수 있는 사람들을 정성을 기울여 가능한 한 초청하십시오. 형식적으로 자기체면 세우기 위해 내가 몇 사람 초청했다고 생색내기 위해서 하는 위선적인 일은 이번에 정리합시다. 진실하게 이번에 정성을 기울여 보십시오. 이웃에게 친절을 베풀고 진심을 보이십시오. 하나님을 모르는 영혼을 구원할 목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할 목적으로, 사람의 영혼의 구원이 목적이 되어, 계획을 세우고 초청하시기 바랍니다. 자기의 체면, 위신이 먼저가 아닙니다. 잃어버린 영혼의 구원이 먼저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지금 어떤 분들은 주위 사람들을, 교회를 부흥시키기 위해, 이 지역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할 목적으로, 계획을 세워 기도하고, 관계를 맺으며, 정성을 쏟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칭찬받을 일입니다.
넷째로 생각할 것은 경건입니다.
하나님만을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이 경건입니다. 그러나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경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사람에게 너무 마음을 썼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보여 지는 데에 급급하여 자신의 소유를 다 바친 척 위장했습니다. 여기에 죄가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우리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머리 좋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재주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9절에“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라고 말씀합니다. “함께 꾀하여”- 머리가 잘 돌아 간다는 말입니다. 사실 거짓말도 IQ가 110 이상 되어야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워낙에 어수룩한 사람은 거짓말도 못합니다. 하는 거짓말마다 들통 나고 맙니다. 그러니 머리 좋은 것 자랑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IQ가 190 이 넘으면 감옥에 갈 소지가 있다고 합니다. 노력이 없고, 진실이 없기 때문입니다. 머리만 믿기 때문입니다. 머리 회전이 이렇듯 빠른 것은 어찌 보면 아주 위험한 것입니다. 그 머리가 잘 돌아가므로 소위 말하는 완전범죄를 꾀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대개 이런 사람들이 마지막에 가서는 바보짓을 하고 맙니다. 똑똑한 것 같으나 헛 똑똑한 것이지요.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재주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땅을 판 값 일부를 감추어 놓고는, 다 바친 것처럼 위장했습니다. 근사하게 위장했습니다. 결국은 그 잘못이 드러났습니다. 그들은 공모를 했습니다. 1, 2 절에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우리 끼리 만 알자”하고 둘이 공모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마음이 잘 맞는 사람들입니다. 둘 중 하나만 똑똑했어도 그렇게는 안 했을 것입니다. 둘 중 하나만 진실했어도 그런 잘못은 저지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둘 중 하나만 정신을 차렸다면, “여보, 이거 무슨 소리요? 어떻게 하나님을 속일 수 있소?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소? 안 바치면 그만이지 바치면서 시험당할 것 없지 않소?”하고 만류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쨌든 이 부부는 나쁜 면으로 맘이 맞았습니다. 사랑, 즉 좋은 면으로 마음이 잘 맞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불의에 마음이 잘 맞는 것입니다. 고전 13장사랑 장에서“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죄를 짓는데 함께 하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죄를 짓고 거짓말 하는 데에, 공모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누가 와서 잘못된 말을 하면, 그 자리에서 잘못을 지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입니다. 그 사람의 마음이 상할까 옳습니다. 하고 맞장구를 치는 것은 그 자체로 무서운 죄가 됩니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지 모릅니다. 이렇듯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공모한 죄가 있었습니다.
여섯 번째로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교회의 영적 권위에 도전했습니다.
교회의 영적 권위를 무시했습니다. 이들을 향하여 사도 베드로가 말씀합니다. 9절에“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 그들은 주의 영을 시험했습니다. 그들이 많은 하나님의 기적적인 능력을 체험하고서도,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여 이르기를“주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지 아니 계신지”의심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뿐 아니라, 그의 통치하심도 의심하여“하나님께서 우리를 먹일 수 있나보자”라고 말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이 같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사도들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 거짓말도 찾아낼 수 있을까? 우리가 그들에게 이것이 판 돈 전부라고 하면 이것은 그 일부에 불과한 것인 줄 분별할 수 있을까?” 이들은 사도들 안에 영분별의 은사가 있다는 것을 생각지 않았습니다. 죄를 짓고도 무사히 벌을 받지 않을 줄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행할 것을 공모하였습니다. 그들은 부부로 결속된 관계를 불법을 행하는데 사용한 것입니다. 그들이 이 문제를 놓고 서로 의견을 나눌 때, 그들은 주의 성령이 그들을 발견하실 수 없으리라고 여겼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뜻을 여호와께 숨기려고 아무리 피했지만, 헛되게도 그것은 알려지고야 만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이 한 마디에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엎드려져 혼이 나가 죽게 됩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교회의 영적 권위, 그리스도의 권위, 하나님의 권위를 온전히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온 교회가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의 말을 듣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본 사람들, 또는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두려워하였습니다. 다시 11절에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기록하여 파급 효과를 성경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먼저, 교회에 참석하고 있는 무리들에게 하나님과 그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아 안겨졌습니다. 그들이 성령의 역사 아래서 생활한다는 경외감이 일어났습니다.
이 일 후에 사도들의 발 앞에 돈을 가져오는 모든 사람들은 판 값의 일부라도 감추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는 위선이 떠나고, 진실한 경건을 찾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고 기억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하는 것은, 믿음으로 살고 진실하게 사는 사람에게는 축복입니다마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은 위선자에게는 그대로가 심판 인 것 입니다. 남들이 좋아하고 기뻐하고 찬송하는 그 시각에 이 두 사람은 죽어야 했습니다.
여러분 치유만이 표적이 아닙니다. 우리는 심판도 표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초대교회에 있었던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이 바로 그 산 증거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이렇듯 귀중한 교훈들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드린 교훈들을 잊지 말고 명심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