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엡1:1-6 ㅣ 김남수 목사]
에베소서를 서신의 여왕이라고 평들을 합니다. 서신서 중의 가장 위대한 책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에베소서는 옥중서신입니다. 바울이 로마 감옥에 있으면서 주후 61~63년경에 감옥 밖에 있는 에베소 교인들에게 쓴 서신입니다.
그리고 에베소서는 공동서신입니다. 한 개인에게 쓴 것이 아니라, 에베소 교인 앞에 보낸 서신입니다. 오늘날의 우리가 성경을 읽듯이 교회에서 온 교인들 앞에 성경을 대신해서 이 편지를 읽도록 사도가 써 보낸 것입니다.
1, 2절에 바울 사도의 서신형식이 나타나있는데, 먼저 발신자, 다음 수신자, 그리고 문안 이렇게 이어집니다.
우리네는 편지를 쓸 때, 먼저 수신자를 씁니다. 예를 들면, “어머님 전상서”, 그리고 “기체후 일향 만강하옵시고”하는 식으로 문안을 하고, 맨 마지막에 “불초소생 올림”하고 끝맺습니다.
우리네는 발신자가 맨 마지막에 있는데, 편지를 많이 받고 문서 정리를 하다보면 부득불 수신자는 나니까 문제가 없고, 발신자가 맨 마지막에 있기 때문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발신자를 먼저 맨 앞에 써놓아야 찾기 쉽고, 누구에게서 온 편지인지 금방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서양인들은 누가 누구에게 그리고 문안을 합니다.
오늘 바울의 서신서 에서도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 발신자가 먼저 나옵니다. 이어서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신실한 자들에게” 이렇게 수신자를 밝힌 다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쫓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문안을 합니다.
이제 1절 말씀을 봅시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서신을 쓴 바울은 그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바울 스스로가 사도가 된 것이나, 자원해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고 불러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로 부르심을 받아 이 편지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서두에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편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고 받으라는 의미입니다.
수신자인 “성도”란 말은 거룩히 구별함을 받은 무리로서 회개하고 그리스도 예수를 믿어 중생한 사람의 마음속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구주로 들어온 사람입니다.
우리 예봄교회 교우들도 성도 거룩한 무리인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한다고 합니다.
신실한 자란 곧 믿을 수 있는 사람이요, 바울이 이렇게 말한 것은 “이 편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사람, 신실하게 읽을 수 있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내가 이런 사람들에게 편지한다는 말씀입니다.
2절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그리스도 예수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문안이자 축복입니다.
참된 은혜와 평강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만이 진정한 은혜와 평강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은혜를 먼저 말하고, 평강을 나중에 말합니다.
이는 은혜를 받아야 마음에 평강이 오기 때문입니다.
3절부터 14절까지 신령한 복에 관해 말씀하고 있는데, 본문 3~6절에서 첫 번째로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성부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교리 입니다.
본문과 로마서8, 9장을 예정론의 쌍벽이라고 합니다.
3절에서 “찬송하리로다.”로 시작하고, 6절 끝에서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구원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니, 말하기 전에 구원의 진리에 감격하여 하나님께 먼저 찬송을 돌리고 있으며, 구원을 얻었다는 하나님의 축복의 진리를 쓰고 생각하니, 감격하여 다시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선택”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늘 선민이라고 생각합니다. 선택된 백성이다.
선택의 교리를 말할 때, 우리는 선택교리를 좀 어렵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선택의 교리처럼 실제적이고 확실한 것이 없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선택의 교리를 자유라는 말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자유, 인간의 자유 - 이렇게요.
하나님의 자유와 인간의 자유를 한번 긴장 관계에 놓고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자유로우실 때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자유 안에서 그만큼 자유가 없습니다.
또 인간의 자유를 주장하면 하나님의 자유가 적어집니다.
그러나 신앙 안에서 이해하게 되면 하나님의 자유 그 속에 나의 자유도 완전하게 있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선택의 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다함으로 해서 우리는 때때로 인간의 자유가 속박되는 듯이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마음대로 하시면 나는 뭐요?” 이런 생각이 들기 쉽습니다.
내 자유가 침해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선택하셨다”는 것은 너무나도 귀한 말씀입니다.
우리 인간들의 의를 다 배제하였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셨다 이 말씀입니다.
거기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좀 더 평이한 말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까? 주님께서 나로 하여금 예수님 믿게 하신 것입니까?
내가 먼저 믿었느냐?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셨느냐? 입니다.
처음에는 내가 믿었다고 하겠지만, 얼마간 지나고 보면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완전히 그 분이 나를 믿게 하신 것입니다.
나는 안 믿으려고 버둥거렸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믿도록 강권적으로 붙들어 놓으셨습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그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선택의 교리입니다.
선택은 신비로운 것입니다.
눈에 당장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벌써 선택권 안에 내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선택을 아는 것은 나중 일이고, 선택은 그보다 훨씬 더 먼저 있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역사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합니다.
4절에 “우리를 택하사” - 이상하게도 이 선택을 3절에서 축복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으로 복 주시되” - 복 가운데 가장 근본적이고 신령하고 크고 영원한 복이 “선택”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한 것입니다.
무엇으로요? -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한 것입니다.
모든 의와 모든 노력과 인간의 모든 것, 자격은 묵살하시고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 말씀에서는 이것이 바로 은혜라고 합니다.
은혜라는 것은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은혜는 선택입니다.
은혜는 예정입니다.
그래서 은혜라는 말씀입니다.
3절에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그 복의 근본이 선택이라고 함입니다.
그런데 여기 보니 “우리 아버지”라고 한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고 표현합니다.
왜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십니까?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가 아니십니다.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의 아버지이신데 이제는 예수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요20:17에 보면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굉장한 말씀입니다.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 지금까지 하나님이 “내 아버지”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짐으로써 그리고 부활함으로써 모든 의를 충족하였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너희 아버지라 하시는 말씀입니다.
내 아버지 너희 아버지 -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순간 -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나 하나님 앞에서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아무나 보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또 그 말을 그쪽에서 받아줍니까?
“내가 어떻게 너희 아버지냐?” 하지 않겠습니까?
일이 그렇게 되면 난감한 노릇이지요.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이 얼마나 굉장한 특권입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 - 중요한 것 또 하나 생각해봅시다.
하나님과 우리가 아버지와 자녀 된 관계이것을 내가 할 수 있는 일입니까?
아버지가 아들을 선택하는 것이지, 아들이 아버지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지요.
아버지가 아들이라고 불러야 내가 하나님 앞에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지, 내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하나님께서 나를 자녀라 하시게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누가 먼저 불러야 됩니까?
내가 “너는 내 아들이라”라고 일컫지 않는데, 그가 나를 아버지라고 부르니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든 좋습니다.
내가 그를 아들이라고 부른다면, 그는 나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택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자녀로 선택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복 중의 가장 큰 복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늘에 속한 모든 복 그리고 신령한 복” - 3가지로 복을 말씀합니다.
하늘에 속한 복이요, 모든 복이요, 신령한 복, 이렇게 말씀합니다.
축복 중의 가장 큰 축복이 바로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한 것입니다.
내 자격은 묻지 않으십니다.
그의 선택, 그 자체가 자격인 것입니다.
4절에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오늘 본문 중 가장 중요한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씀입니다.
예정론의 핵심이 되는 말이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다”입니다.
칼빈은 이 말씀에서 성령님의 조명을 받아 예정론을 깨달은 것입니다.
예정론의 핵심이 바로 이 요절에 있습니다.예정론의 생명력이 바로 이 요절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 - 그리고 이것은 신비롭게도 “창세전에” 이루어졌습니다.
“창세전에” 선택하셨습니다.
창세전이라는 것은 시간적으로도 의미가 있지마는 그보다 본질적인 의미가 더 큽니다.
만물이 아무리 중요하다해도 만물이 있고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우리 인간 생명이 더 소중합니다.
그래서 창조를 보면 만물이 먼저입니다.
산이 창조되었고 달이 창조되었고 세상이 창조되었고 즉 인간이 살 수 있는 환경을 먼저 창조하셨고, 끝에 사람이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형식적인 것이었고, 의미적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벌써 여러분의 생명이 선택된 것입니다.
세상 창조보다 선택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창세전에 인간의 생명이 하나님의 마음 계획안에 먼저 있었습니다.
여기서 진화론적 세계관과 다른 것입니다.
무엇이 차츰 차츰 진화되어서 인간이 되었다는 것이 진화론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창세전에 인간의 생명이 하나님 마음 안에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창세전에 벌써 선택된 생명입니다.
그리고 세상 창조가 있고, 세상이 있고…. 이렇게 해서 우리가 태어난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창세전부터 선택된 생명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아주 소중한 것입니다.
만물보다 훨씬 먼저 있었다는 것, 이것이 인간 존재의 바른 의식입니다.
내가 우연히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명은 인격적이고 은혜적이고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이치를 가리켜 “기독론적 선택교리”라고 말합니다.
선택교리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합니다.
그 속에 내 예정이 있는 것입니다.
나를 선택한 교리가 그 속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다시 설명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란? 곧 사랑 안에서입니다.
너무나 귀하고 정말 복된 교리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그리스도와 신비적인 연합을 말합니다.
바울은 이 결합을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바울이 말한 신비란? 그리스도 안에서 호흡하며, 생각하고, 일하고 사는 확신적인 실존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택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라 말씀합니다.
선택해 놓으셨는데 선택된 이유가 뭐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입니다.
다시 말하면 선택뿐 아니라, 성화도 하나님 편에서 이루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고 자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자녀 되는 것을 보아서 어느 수준이 되어야 합격이라고 하고 “자녀”라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자녀로 삼으시고 선택하시고 자녀답게 키워 나가시는 것입니다.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는”것입니다.
이것이 선택의 교리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의 먼저입니다.
윤리는 그 뒤에 오는 것입니다.
윤리에 따라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기독교 윤리요,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선택하시고 그 다음에 선택된 자로 키워나가시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사랑은 그 대상을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자녀를 키워보아서 자녀로 호적에 올립니까? 그것이 아니지요. 낳자마자 호적에 이름을 올립니다.
그리고 내 아들 내 딸답게 키워나가는 것입니다.
선택의 교리가 이렇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선택은 예정된 것입니다.
5절에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정하시되 “그 기쁘신 뜻대로” 예정해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신 것입니다. 4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다 하였고 여기 5절에서는 예정하셨다 합니다.
예정이란? 미리 정하신 하나님의 의지 뜻을 말하고, 선택이란? 그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택하신 행동을 말합니다.
이렇게 쉽게 생각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의지 뜻이 먼저이고, 행동이 다음입니다.
행동 선택이 먼저가 아니고 뜻 예정이 먼저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지가 바로 예정입니다.
이것은 논리적인 표현이고 실제는 예정과 선택이 동시적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자연이나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깊으신 뜻” 안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뜻대로 입니다.
하나님의 가슴속에 있는 의지 뜻이 먼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계획대로 척척 이루어지는 것입니다.이것이 예정입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입니다.
하나님의 의지대로이니 기쁘신 것이지요.
기뻐하심을 근본으로 해서 뜻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되어 지도록 하나님께서 정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길은 전연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고 하는데, 그러면 자매들의 경우 어떻게 되는지 의문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육신의 겉 사람은 생리학적으로 아들이 있고 딸이 있지만, 영적인 속사람은 모두 아들 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 모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혔다고 했으므로 형제 이건 자매이건 남자건 여자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두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예정해 주셨고 선택해 주셨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해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6절에 “ 그의 사랑하는 자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랑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정해 주시고 선택해 주시고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 목적이 무엇일까?
선택받은 사람이 할 일이 무엇일까?
감사할 일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할 것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생각을 하여야 할 것이 있는데 바울은 고민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나는 선택받아 감사하지만, 하나님 왜 저 사람은 선택 안하셨습니까?” 하는 것입니다. 이에 관해 성경은 롬 9:19-28에서 자세히 설명합니다.토기장이를 예로 드는데, 토기장이가 그의 마음대로 즉 그의 뜻대로 그릇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릇이 토기장이에게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느냐고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토기장이 마음대로 뜻대로 만드는 것입니다.선택도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걱정할 일이 아니지만 그러니 여기에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선택받았다”의 반대말은 “버림받았다”입니다.
여기서 선택과 버림받음이 다 같은 예정이라 하게 됩니다.
예정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주권자이시고 창조자이신 하나님께서 그 분의 뜻대로 예정하시고 선택하시는데,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관해 피조물인 인간이 왈가왈부할 것이 아닌 것입니다.
예정, 선택교리는 성령의 계시를 받아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진리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하나님께서 행하신 신비로운 일인 것입니다.
그리고 “거저 주시는 바”입니다.
우리에게는 자격이 없는데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요.
나는 그렇게 잘못된 길로 갔는데도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셨지요.
내가 그렇게 못되었는데도 하나님께서는 참으시고 교육하시고 훈련시키시지요.
생각할수록 전부가 다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내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찬미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택받은 우리가 생각할 일입니다. 선택받은 자가 할 일은 찬양 감사인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또 은혜 주셨군요. 나를 그래도 버리지 아니하시고 사랑해 주시는군요. 감사합니다.”거저 주시는 바입니다.그러니 은혜인 것입니다.
이 은혜를 길이길이 자랑하면서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다 - 이 교리 속에 참된 찬양이 있고, 만족한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불안해서 살 수가 있겠습니까?
그 분의 의지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나는 안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시니 나는 편안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마음이 변하듯이 변덕을 부리신다면 큰일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그분은 변하지 않으시니 안심이 됩니다.
그 분은 믿을 수가 있는 분이십니다.
당연히 거저 주시는 바 은혜를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해주셨으니 가장 큰 선택의 축복을 누리시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복된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