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1:28-30ㅣ김남수 목사]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화창한 봄날 어미 꿩이 새끼 꿩들을 들판에 데리고 나가 먹이를 주워먹고 있었습니다. 어미꿩이 줄줄 따라다니는 새끼 꿩들을 모아놓고 단단히 주의를 줍니다. “얘들아 너희들은 땅 위에서 먹이를 찾아 먹을 때는 입으로는 먹이를 먹고, 눈으로는 먹이를 찾고, 발로는 더듬고 뒤집겠지만 귀만은 언제나 열어놓고 내 음성을 듣도록 하라. 어느 때에 갑자기 여우가 와서 너희를 헤칠는지 모르니까 내가 큰 소리를 치면 빨리 내게로 달려오도록 해라” 이렇게 간곡하게 주의를 주어서 이 새끼 꿩들은 먹이를 먹다가도 어미 꿩이 큰 소리로 위험을 알리면 모두들 모여듭니다. 그런데 어미 꿩이 큰 소리로 위험을 알리면 모두들 모여듭니다. 그런데 어미 꿩이 한 말을 별로 마음에 두지 않고 유독히 자기 멋대로 여기저기 좋은 먹이를 찾아 자꾸 멀리 가는 새끼 꿩이 한 마리 있었습니다. 너무 멀리 나간 이 새끼 꿩은 여우가 왔을 때, 어미의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어 결국은 여우에게 잡아 먹히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멀리가도 들을 말은 들을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 합니다. 들어야 할 음성은 들어야 합니다. 아무리 바빠도 들어야 할 말은 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에서 보는 대로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가운데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씨 뿌리는 자가 밭에 가서 씨를 뿌립니다. 그런데 이 종자는 하나님의 말씀 극상품인데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 밭이 길가와 같은 마음. 돌밭과 같은 마음, 가시덤불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말씀의 역사를 나타낼 수 없습니다. 옥토와 같은 마음, 열린 마음,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그 종자를 받아들일 때에 그 종자가 마음속에 들어가서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30배, 60배, 100배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평범하면서도 완전한 진리의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마음의 밭.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냐가 문제입니다. 복음 전도자가 있고, 말씀을 전하는 자가 있다는 것은 곧 축복입니다. 말씀이 들린다는 사실, 그 자체가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들어야 하고, 믿어져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안 믿어지면 도리가 없습니다. 가끔 사람들이 이야기 하다 보면 고민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믿고 싶습니다. 그런데 믿어지지 않습니다.” “듣고 싶습니다. 그런데 들리지 않습니다.”라고 하소연 합니다. 지금 예배 드리는 이 시간에도 보면 듣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지 모릅니다. 도무지 들리지 않습니다. 믿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도리가 없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사람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고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으로 산다- 어떻게 사는 것입니까? 말씀을 들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말씀이 곧 생명입니다. 그런데 말씀은 있는데, 들리지가 않습니다. 그런가 하면 말씀은 들리는데,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들음은 들음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1절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씀을 듣는 자세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이 강론할 때에 유두고라고 하는 청년이 멀찍이 창문에 걸터 앉아 졸다가 떨어져 죽는 이야기도 있듯이, 멀찍이 있는 마음은 좋지 않습니다. 말씀이 있는 곳으로 좀 더 가까이 해야 합니다. “말씀에 가까이 하는 것”- 이것이 성전이요 예배요 교회가 아니겠습니까? 편견이나 고정관념에 매이지 않고 집중하여 듣습니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소중한 일입니다.
1)“가까이 하여 듣는다”-이는 마음을 열고 가까이 한다는 말씀입니다.
경청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꾸 멀리 가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가까이 가까이 가면서 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집중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너무 쉽게 비판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너무 빨리 판단하지 마십시오. 좀 천천히 듣고, 다 들읍시다. 더 할말이 없소” 할 수 있을 때까지 들읍시다. 그러고 나서 이야기 해도 바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느 사이에 듣는 중에 판단해 버립니다. 또한 여자는 머리가 너무 좋아서 다 듣기도 전에 다 알아버렸어요. 그리고 미리 압니다.”그만해도 충분합니다. 당신 뱃속에 내가 들어갔다가 나왔는데 그걸 모르겠소? 그만하고 내 이야기 들어요” 좀 미련한 척 할 것입니다. 들읍시다.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특별히 신뢰하는 마음으로 긍정하는 마음으로 듣는다면 금상첨화입니다. 일단 긍정하는 것입니다.
2)”가까이하여 말씀을 듣는 것”- 이 말씀은 또한 듣는 몸의 자세도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어떻게 듣느냐, 어떤 자세로!- 공부하는 사람은 공부하는 자세. 예배 드리는 사람은 예배 드리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사관학교에서는 의자가 있어도 등을 의자에 못 기대게 합니다. 등을 대면 “넌 정신이 틀렸다”입니다. “가까이 하여”- 실제 몸을 가까이 하여 정신차리고 듣습니다. 말씀을 듣는다- 들리도록 듣는 것입니다. 똑바로 보면서 듣는 것입니다. 무릇 보지 않고, 듣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대체로 부부싸움 할 때는 마주 안 보고, 언성만 높이지요. 거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마땅히 서로 눈과 눈이. 얼굴과 얼굴이, 가까이 하여 듣는 것부터 할 것입니다. 절대로 자기 생각에 매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정욕에 매이지 말고, 편견에 매이지 말고, 고정관념에 매이지 말 것입니다. 특별히 깨끗한 마음으로 이 시간만은 마음을 열고 들어야 합니다.
빈첸시라고 하는 수도사에게 하루는 가정문제로 몹시 고민하는 여인이 이혼 직전에 찾아 와서는 너무 가정에 불화가 많고 남편과의 다툼이 많아서 살수가 없다고 하소연 합니다. 듣고 나서 수도사는 “우리 수도원에 지금 이렇게 우물이 이것이 성수입니다. 이 성수를 한번 퍼 담아 가지고 가서 두었다가 남편이 싸우려고 시비하거든 입에다 그 물을 한 모금 무세요, 뱉지도 말고 딱 물고 계세요. 남편 말 끝날 때까지요, 그 다음에 또 그렇게 하세요. 그렇게 하면 효험이 날 것입니다.” 하고 돌려 보냈습니다. 그 여인은 수도사가 시키는 대로 하였습니다. 남편이 시비를 걸 때 마다 그 물을 한 입 물고. 대꾸를 하지 않았지요. 마침내 가정이 조용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여인은 또 다시 수도원에 찾아오더니. 그물이 참 성수라고, 신비로운 물이라고 감탄을 합니다. 수도사는 “그 물이 신비로운 것이 아닙니다. 침묵이 신비로운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침묵을 배우십시오. 좀 더 조용하기를 배우십시오” 대답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2절에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함부로 입을 열게 되면, 자연히 나 됨을 잊어버리고 예수님이 예수님 되심을 잊어버립니다. 급한 마음은 자기 생각을 관철하려는 마음으로 이로써 욕망의 노예가 되고 감정의 노예가 됩니다. 이러한 욕망에 사로잡혀 말씀을 들어도 들리지 않고, 기도를 해도 몸부림뿐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끔 상담을 하는데, 자기 사정만 죽 늘어놓고는 “ 목사님 안녕히 계십시오”하고 그냥 돌아갑니다. 이런 분들은 도대체 왜 저를 찾아오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지혜로운 사람은 언제나 말씀을 들으려 합니다. 그 당장에 응답하지 않습니다. 깊이 생각하고, 명상하고 가슴에 두고 나아가 실제 자기 생활에 옮겨 놓습니다. 그리하여 그것이 자기의 성품으로 된 다음에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우매한 사람은 듣자마자 바로 그의 생각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정작 자기 마음에는 남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 인격에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않습니다.
본문 말씀 4절은 우리에게 “서원한 것은 갚아라”라고 강하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한번 말한 것을 번복하고 실수가 많은 사람은 지혜롭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말씀을 듣는 사람입니다. 듣고 행하는 사람입니다. 사무엘상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리라” 듣는 것이 우선이라고 말씀합니다.
어느날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의 초대를 받아서 그녀의 집에 들르셨습니다. 언니 마르다는 예수님을 위하여 음식을 준비하느라고 아주 부산스럽습니다. 반면에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 앞에 조용히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있습니다. 혼자 수고하는 것에 심술이 난 마르다는 예수님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라고 청합니다. 그러매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좋은 편-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물론 음식을 대접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리고 그 보다는 앉아서 말씀을 듣는 것이 더 좋은 일입니다. 우리는 어느 편이 진정 예수님을 대접하는 것인지를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남서울교회 있을 때, 심방 갈 때 종종 겪는 일입니다. 음식 대접하겠다고 그 주인이 부엌에서 수선을 덜고, 인사도 제대로 안 합니다. 심지어는 “우리 예배 드립시다”하면 “예배 드리세요 저는 음식 준비할께요”합니다. 도대체 누굴 위하여 예배를 드리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무엇이 더 중요합니까? 목사가 배가 고파서 얻어 먹으러 갔겠습니까? “말씀을 듣는 것”- 이것이 진정한 대접입니다. 그것이 최우선적인 일인 것입니다.
다시 오늘의 본문 말씀 1절을 보십시오. 바른 예배의 자세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1절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재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예배의 제1조가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듣는 자세가 아주 중요합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그런 일이 없습니다마는 목회자들 세미나 때, 강의하다 보면 처음에는 팔짱을 끼고 앉아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팔짱끼고 비스듬히 앉아서 설교할 테면 해 봐라! 하는 자세 보기가 민망스럽습니다. 딱합니다. 이 자세로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그런데 세미나 말미에 가서는 그간 은혜로 받아 제일 앞자리에 와서 앉습니다. 30년 이상 목회활동을 하다 보니 교인의 믿음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는 바로미터가 하나 생기더라고요. 다른 것 다 제쳐놓고, 말씀을 듣는 자세입니다. 이것이 빗나가면 다 빗나갑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서면 그때부터 참 교인이 됩니다. 늦게 오던 사람이 일찍 오고, 뒤에 앉던 사람이 앞에 앉고, 기지개만 켜고 하품하던 사람이 눈이 초롱초롱해지고….. 말씀 듣는 자세가 변합니다. 말씀 듣는 이러한 자세가 바로 그 사람의 신앙과 인격과 성품으로 이어집니다. 나아가 구원으로 이르게 됩니다.
마태복음 8장에 한 백부장의 하인이 중풍으로 누워 고생하는데, 백부장이 예수님께 나와 고쳐주십사 청원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서 고쳐 주시겠다고 하시자. 너무 송구스러워 “말씀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하고 아룁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크게 칭찬하시어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했노라”말씀하십니다. 그 사람이 성경을 많이 압니까? 교리를 많이 압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말씀대로 순종하겠다는 것입니다. 백부장은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대로 순종하겠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는 이것이 최고의 믿음이요. 어떤 의미에서는 예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생각해봅시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25년이 지나도록 기다렸습니다. 아브라함은 100세가 되고, 사라는 90세가 되어 자녀를 가질 수 없는 신체가 되었습니다. 그때. 자기들로서는 불가능하나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면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오감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100세에 아들. 이삭을 주셨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의 의가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여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리하여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사실을 그대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하신 말씀을 그대로 믿습니다. 성경말씀을 그대로 믿는 것이 “의”에 이르는 길이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가장 불행한 사람은 들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하늘 아래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단 한마디도 듣지 못했다면, 얼마나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러나 이보다 더 불행한 일은 말씀을 들으면서도 넘겨 듣고, 삐딱하게 듣고,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을 활짝 열고,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믿으십시오. 그리하여 그 말씀이 내 마음과 인격을 지배하고, 내 성품을 지배하고, 나아가 내 운명까지 지배하게 하십시오. 그 진리의 말씀이 내 귀에 들어와 역사할 때에. 내가 곧 자유 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생명이 있습니다.